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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7.26 한 여자, 두 남자 (13)
  3. 2010.07.15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10)
좋은 글 소개2010.07.27 13:35

 남편을 살리고 떠난 아내


   울산시 신정동에 사는 정태진 씨(46)는
   매년 8월 4일이 되면 6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의 생일상을 차린다.
생일케익

  '고향 간 사람'의 생일상을 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사연이 숨어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아마 아직까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정씨가 고인이 된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지난 1987년
   4월, 전북 김제 평야지대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영농후계자로 선발돼 종묘, 농약 등의 구입문제로
   종종 상경하곤 했는데 기차에서 우연히 동석하게
   된 사람이 아내였다. 

                                                            
   
   
   그렇게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했고 정씨는 당시
   사회문제가 됐던 농촌총각 장가 못가는 서열에서도
   빠질 수 있었다. 비록 농촌에서의 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아내의 고운 심성에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해 6월 10일, 농기계 구입을 위해 기차로 상경한
   그는 서울역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오는데
   시위행렬을 보았다. '6.10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다.
   정씨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위대에 떼밀려 대열에
   합류한 후 어느덧 시청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두 팔을 하늘로 향하고는 독재 타도, 민주 쟁취를
   외쳤다.

   그러다가 최루탄이 터졌고 정씨는 이를 피하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정씨는 흩어지는 시위행렬에
   무참히 짓밟혔고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상이었고 옆에는 시골에서 급히
   올라온 홀어머니와 아내가 지키고 있었다.

   그 사고 후 한동안 다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노환으로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도 했지만 89년에는
   2세도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두통이
   오기 시작했고 여러 군데 병원을 다닌 결과 뇌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게 됐다.
   치매 혹은 알츠하이머병인데 6. 10 민주항쟁
   현장에서 머리를 다친 후유증이 이제야 온 것이다.
   이때가 1991년이다.

   정신착란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로 정씨는
   망가져갔다.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바깥을
   돌아다닐 정도로 온전치 못한 그의 몸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이처럼 심각한 정도의 정신병 환자로 91년부터
   99년까지 8년을 살았으니 그 동안 가족들의 고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이런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다.

   그동안 아내는 그 많은 농지를 정리해 미국의 유명한
   정신병원인 '동부 컨퍼런스 병원'에서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다. 1년에 네 다섯 차례 미국의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 동안 정신이 오락가락 하면서
   그의 삶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지극정성에 힘입어 정씨는 차도를
   보였고 99년 병원 측으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았다.

   정씨는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999년 12월 17일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아내는 이미 자궁암 말기 환자가 되어 병원에 누워
   있었다. 빡빡 깎은 머리에 모자를 쓴 채 말 한 마디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아내는 죽음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그 동안 남편의 정신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병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아내의 지극
   정성으로 즉 아내 덕분에 정신병을 고치고 다시
   태어나는 순간인데 아내는 이 기쁜 순간을 누리지
   못했다.

   남편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일 만인 1999년
   12월 21일, 눈을 감지 않으려고 미간에 잠깐 동안의
   미동만 보이다 아내는 생을 마감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남편을 살리고 대신 자신이
   떠나 간 것이다.

   그 후 남편은 아내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아내의 생일상을 차린다.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씨가
   살아 있는 동안 제사 대신 아내의 생일상을 차리기로
   한 것이다. 또 주변에서는 세월이 약이라며 정씨에게
   새로운 삶을 권유하지만 먼저 간 아내를 배반할 수
   없어 혼자 살고 있다.                                                


세상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 내 사람이다" 라고 점찍어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복된 일입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보완하여 완성해가는 삶.
그 인연을 소중히 지켜 가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에게,
사랑의 말을 속삭여 보세요.
삶의 동반자, 당신이 계셔서 행복합니다
                                                                                                            
                                                                                                                        사랑밭 새벽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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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국제옥수수재단
좋은 글 소개2010.07.26 14:12


한 여자, 두 남자

햇빛



1973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부터 내겐 시동생과 함께 사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장남과 차남이 세상을 떠난 뒤라 셋째인 남편이 동생들을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시동생은 그때 이미 직업도 취미도 소일거리마저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하다 일어난 사고로 지병인 간질을 앓게 된 시동생은 가족들의 맹목적인 보호 아래 성격은 비뚤어지고 오로지 자신만 아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무시 당하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시동생은 봄만 되면 가출을 했다.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다가 쓰러져 이곳저곳 파출소와 병원으로 그를 찾으러 다녀야 했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까지 신생아를 돌보듯 일일이 챙겨 줘야 했다. 그 즈음 나는 내 인생에는 남편 외에 한 남자가 더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이들이 자라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집과 가까운 곳에 시동생이 지낼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다. 딸 시집 보내는 엄마처럼 옷장, 이부자리 등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그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말이 독립이지 모든 것을 형과 형수가 해결해 주는 종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즈음 시동생은 술로써 삶의 위안을 찾았고, 지병이 있는 그에게 술은 독약이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바람이 몹시 불던 늦가을 밤, 병원 응급실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시동생이 술을 마시고 무단횡단하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라고 했다. 중상을 입은 시동생은 연이은 뇌수술로 의식을 회복하는가 싶더니 이내 기억과 감각의 끈을 놓고 말았다. 말 그대로 식물인간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간병인을 두었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의사는 정상적인 회복은 기대할 수 없지만 잘 간호하면 평균수명은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이 없는 삶이 온전한 삶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산 목숨을 끊을 수는 없는 일, 나는 큰 결단을 내리고 시동생을 간병하기로 작정했다. 날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중환자실로 옮기면서 기도했다.

'제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난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시동생은 모든 감각을 잃고 아침이면 오줌에 절은 눅눅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커튼을 친 뒤 시동생의 옷을 벗기고 얼굴을 씻기고 면도를 하고 온몸을 닦아 내고 기저귀를 갈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설사와 변비가 번갈아 오는 시동생의 손톱 사이에 끼어 있는 변을 칫솔로 닦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정말 내 마지막 인내심마저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이게 지옥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시동생에게는 두 살 위의 같이 늙어 가는 형수뿐 아무도 없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남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사람 같았다. 혈육의 고통으로 나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 그를 한순간 이해하다가도 나를 지치게 하는 시동생의 감정 없는 눈을 보노라면 내 고통과 울분은 여지없이 남편에게로 꽂혔다. 그때 난 다정한 말 한마디가 너무도 절실했지만 남편은 입을 꾹 다물 었다. 엄청난 현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남편이 미웠다.

아,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도 변질될 수 있구나. 인생에 대한 회의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내 건강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2년의 세월이 흐른 뒤, 평균 수명을 살 거라는 시동생은 패혈증으로 한 많은 인생의 막을 내렸다. 그 운명의 순간에 바위 같던 남편이 동생의 차가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세상 사는 동안 고생만 했구나. 저 세상에 가서는 건강하게 태어나 행복하거라.” 남편도 시동생도 나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나약하기만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시동생은 갔지만 그는 나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려놓았다. 그의 장례가 끝나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과제도 끝나고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그제야 내 손을 잡으며 “당신, 정말 고생 많았다”고 애정 어린 말을 했다.

시동생은 내게 많은 것을 주고 갔다. 그가 살아생전에도 나는 남편에게 입버릇처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시동생은 우리집에 오는 모든 액운을 몸으로 막는 사람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랬다. 우리집은 시동생이 아픈 것 말고는 아무 걱정이 없었다. 아이들 모두 탈없이 건강하게 자라 주었고 당시 중학생이던 늦둥이 아들은 일찍 철들어 늘 엄마사랑이 부족할 텐데도 불만은커녕 엄마를 위로하는 든든한 청년으로 자랐다. 내 힘들었던 삶이 자양분으로 녹아 아이들 성장의 토양에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천연의 비료가 되기라도 한 걸까.

한 달 뒤면 시동생 3주기다. 남편과 나는 서글서글한 눈매의 시동생 영정을 들고 그의 안식처를 찾아갈 것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다하는 날 어디에선가 시동생을 만난다면 그는 “형수요, 그 동안 어찌 지냈능기요” 하며 따뜻하게 내 손을 잡을 것만 같다.


             황연숙님 (가명) 
             월간《좋은생각》 200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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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소개2010.07.15 14:29
한 여인의 이야기...
여인

 재판을 하다 보면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 이러한 만남 가운데 오래전에 법정에서 증인으로 만났던 한 여성을 잊을 수가 없다.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녀가 보여 준 기품과 용기는 감동적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우울해질 때면 그녀를 생각하며 다시 힘을 얻곤 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사건에 관해 증언하려고 법정에 출석했다. 남편이 그녀 몰래 여섯 살, 네 살 된 두 딸에게 독극물이 든 우유를 먹여 절명하게 했던 것이다. 남편 자신도 남은 우유를 마셨으나 목숨을 건졌고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다. ……

그녀에게도 딸들은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사이 남편은 여러 번 실망스러운 일들을 저질러 그녀를 힘들게 했고, 애정도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두 딸의 출생 때부터 죽기 전날까지 같이 지낸 일상과 딸들이 세상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길 기도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 모녀가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깔깔대며 뒹구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힘든 생활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그러나 남편은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을 잃고 두려움에 빠져 딸들과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딸들이 자기처럼 비참한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일찍 세상을 떠나보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피고인 신문이 끝난 후, 재판부 직권으로 그녀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형량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법정에 나온 그녀는 예상보다 몸이 훨씬 더 불편해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 심장병과 척수염, 류머티즘으로 날마다 여러 종류의 약을 먹고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고 했다.

증언대에서 그녀는 딸들을 살릴 수 있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흐느꼈다. 그러나 곧 눈물을 거두고 차분한 태도로 남편에 관하여 증언했다. 처음에는 분노로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남편과 살 수도 없고 애정도 전혀 없지만, 재판부에 편지를 낸 이유는 남편이 '정당한' 판결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남편이 아이들을 미워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세상에서 받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죽게 한 것이며, 잘못은 남편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약한 남편에게 가벼운 형을 주어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증언을 끝맺었다. ……

지독한 가난 속에서 중병을 앓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이들을 밝게 키워 온 그녀 내면의 힘. 이것이 삶에 대한 진정한 용기 아닐까? 인간의 가치는 결코 외적인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야말로 작고 약한 외모 안에 진정으로 위대한 힘을 가진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에게 온몸으로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처럼 '훌륭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감히 고백한다.

- 윤재윤 판사의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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